▲왕십리 김종분. ⓒ인디스토리
▲왕십리 김종분. ⓒ인디스토리

- 모정에 투사해 되돌아보는 한국 현대사의 치열했던 순간들

[SRT(에스알 타임스) 심우진 기자] '왕십리 김종분'은 김진열 감독의 여섯 번째 장편 다큐멘터리다. 김진열 감독은 1998년 여성장애인의 결혼생활을 기록한 '여성장애인 김진옥씨의 결혼이야기'(1999)로 다큐멘터리 작업을 처음 시작했다.

사적 다큐멘터리인 '땅, 밥 만들기'(2000), 한국전쟁 당시 여성 빨치산이었던 박순자 선생을 기록한 '잊혀진 여전사'(2004), 첫 다큐멘터리의 후속편이라고도 볼 수 있는 '진옥언니 학교 가다'(2007),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의 진상규명 활동을 기록한 '나쁜 나라'(2015) 등 분단의 현실, 장애 여성, 세월호 등 사회 이면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아왔다.

▲왕십리 김종분. ⓒ인디스토리
▲왕십리 김종분. ⓒ인디스토리

다큐멘터리 영화 '왕십리 김종분'은 지금까지의 그가 만든 영상 작업과 궤를 같이한다. 이 영화 또한 개인사와 역사가 씨줄과 날줄로 엮어 한국 현대사의 뒷모습을 조명하는 작품이다.

(이 리뷰에는 영화의 내용이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김종분은 서울 왕십리역 11번 출구 노점에서 옥수수를 찌고, 가래떡을 굽고 채소를 판다.

그는 맏딸 귀임이 세 살일 때부터 지금까지 50년 넘게 왕십리에서 노점상을 해오고 있다. 김종분은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거리로 나와 수십 년을 한자리에 머물며 고단하게 장사해온 팔순이 넘은 '가장'이자 '워킹맘'이다.

물건 사는 손님이 돈이 부족하다 하면 김종분은 "나중에 줘"라며 봉지에 담아 선뜻 건넨다. 사람들은 오다가다 그의 노점에 들러 외상값을 갚는다. 사람 냄새 풀풀 나는 길거리 풍경이 친근하고 달갑다. 노점상 동료들인 '왕십리 시스터즈' 장석래, 임정화, 노명연과 오래간만에 모여 먹는 게장 맛이 달다. 친구들이 치는 10원짜리 화투판을 구경만 하던 김종분은 이른 시간 단잠에 빠져든다.

▲왕십리 김종분. ⓒ인디스토리
▲왕십리 김종분. ⓒ인디스토리

김종분은 일제강점기인 1939년에 태어나 만 24살 되던 해인 1963년 첫 아이를 낳았다. 인천에서 목재 일을 하던 남편은 서울로 오자 새우젓을 팔기 시작했지만, 장사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둘째 귀정을 낳은 지 얼마 안 됐던 시기, 쌀조차 사 오지 않는 남편 대신 김종분은 밖으로 나가 돈을 벌기 시작했다.

노점만이 아니었다. 낮엔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시멘트를 나르고 밤에는 친정어머니가 떼다 준 물건을 팔아 억척스럽게 세 남매를 키웠다. 파출부 일도 했다. 그런 어머니 곁에서 큰딸 귀임은 일찍 철이 들었다. 아홉 살 때부터 밥을 지어 동생들과 아버지 식사를 도맡았다.

▲왕십리 김종분. ⓒ인디스토리
▲왕십리 김종분. ⓒ인디스토리

그들은 마을버스를 타더라도 청룡 열차처럼 한참 가파른 고개를 올라가야 하는 하늘 위 달과 가장 가까운 산동네에 살았다. 김종분은 워킹맘으로 바쁘게 살며 장사하는 와중에도 나 몰라라 하지 않고 아이들 학교 입학과 졸업식은 꼭 챙겼다.

◆ 고기 대신 냉면 먹자던 딸 '귀정'

어려운 환경 속에서 똑똑했던 둘째 딸 귀정은 한국외국어대학교에 합격한다. 동생 종수는 대학생이 몇 안 되는 동네에 살던 시절이라 누나가 자랑스러웠다고 회상한다. 어머니 김종분 또한 마찬가지였다. 입학식 날 돈이 없으니 고기 대신 냉면을 먹겠다던 속 깊은 딸 귀정은 집안의 자랑이었다. 하지만 그런 가정 형편으로 귀정은 한국외국어대를 자퇴해야만 했고 낮에는 자동차 정비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아르바이트했다. 그 뒤 귀정은 1988년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한다. 그때서야 김종분은 딸 귀정이 학교를 그만뒀었던 사실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왕십리 김종분. ⓒ인디스토리
▲왕십리 김종분. ⓒ인디스토리

김종분은 파출부로 일하던 집에서 딸 귀정이 과외 선생님이었던 덕분에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일이 없었다며 뿌듯했던 옛 기억을 떠올린다. 귀정은 과외 외에도 봉제공장 보조, 식당일 등을 했다. 그런데도 등록금을 다 마련하지 못해 고민했다.

귀정은 언제나 도움을 주는 주변 사람들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빈민층으로 살고 싶지 않았던 귀정은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했다. 그리고 운동권 동아리인 심산연구회 회장이 됐다. 귀정은 민주화 투쟁이 한창이던 90년대 초 세상을 뒤덮었던 자욱한 최루탄 연기를 마시며 교문 밖 거리로 뛰쳐나갔다.

▲왕십리 김종분. ⓒ인디스토리
▲왕십리 김종분. ⓒ인디스토리

어느 날 갑자기 귀정이 다쳤으니 병원에 같이 가자는 말에 그 길로 택시를 타고 병원에 도착한 김종분은 딸의 시신을 확인하고 오열한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치열한 삶을 살던 귀정, 아름다운 신부가 된 이를 부러워하던 귀정은 1991년 5월 투쟁 시위 중 충무로 대한극장 부근에서 경찰의 과잉 진압 속에 24살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먼저 간 자식을 가슴에 묻어두고 30년을 살아온 김종분은 "나는 돈이 필요 없다"면서 자신은 이제 막가파 인생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직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서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점 장사를 하고 있다. 이유가 뭘까. 김종분이 노점을 계속하는 이유에 대해 국가대표 수영선수인 손녀 정유인은 "(귀정)이모를 기억하고 할머니를 기억해서 와 주시는 분들이 많아서일 것으로 생각한다"고 설명한다.

▲왕십리 김종분. ⓒ인디스토리
▲왕십리 김종분. ⓒ인디스토리

김진열 감독은 고(故) 김귀정 열사의 어머니임을 중간에 드러내는 영화의 구성에 대해 "장녀로서의 김종분, 가장으로서의 김종분, 딸을 잃은 엄마로서의 김종분 등 여러 가지 삶이 있는데 그중에서 현재를 중요하게 여겼다. 자녀를 잃고 슬픔에 빠지는 어머니가 아닌, 현재에도 열심히 자기 일을 하는 여성으로 그려지길 바랐다"고 말했다.

지난 3일 열린 언론시사회에서 김진열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든 계기에 대해 "재작년 겨울 인터뷰 기사를 보게 됐고 김종분 씨의 생애 기록을 남기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성대 88학번인 곽용수 인디스토리 대표가 김귀정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신 분이셔서 30주기에 맞춰 추모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면 어떨까 이야기가 나오고 추모사업회도 같이 결합하게 됐다"고 밝혔다.

▲왕십리 김종분. ⓒ인디스토리
▲왕십리 김종분. ⓒ인디스토리

김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해 "1939년생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안에 들어있는 역사를 더듬어 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작업했다.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은 다양하게 해석해 주신다. 각자가 다양하게 보실 수 있는 포지션들이 있으므로 많은 분이 보시고 우리 시대 어머니의 이야기에 공감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시사회에 참석한 김종분 씨는 "우리 딸이 엄마를 출세시켜줬다. 노점 장사만 하다가 별별 곳을 다 가본다. 부산국제영화제에도 갔다 왔다"고 말했다. 이어 "집에서 잠을 제대로 못 자고 노점 길바닥에서 10년을 살았다. 길바닥에서 그냥 잤다"며 딸 김귀정을 잃고 지냈던 그간의 세월을 전했다. 김종분 씨는 "생각해보니 끈질기게 노점을 했다. 이 생명 다하도록 몸 못 쓸 때까지 노점을 하겠다"고 말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왕십리 김종분'은 어머니도 유가족도 아닌 인간 김종분이 오늘을 사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 제목: 왕십리 김종분

◆ 관람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 러닝 타임: 102분

◆ 개봉일: 2021년 11월 11일

◆ 감독: 김진열/출연: 김종분, 김귀임, 김종수, 정유인/프로듀서: 곽용수/제작·배급: 인디스토리

▲왕십리 김종분. ⓒ인디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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