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문화유산 보존과 사회에 기부, 기증은 나라사랑의 정신에 의해 이뤄진다는 점을 강조하는 천신일 이사장.ⓒSR타임스
▲기업의 문화유산 보존과 사회에 기부, 기증은 나라사랑의 정신에 의해 이뤄진다는 점을 강조하는 천신일 이사장.ⓒSR타임스

◆ 홍용락 고문이 만난 '시대를 바꾸는 사람들' [14] 석조문화재 환수로 애국 실천한 천신일 ‘우리 옛돌 박물관’ 이사장

천신일 이사장은 기업인으로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한창 기업활동 하던 시절 ‘세중여행사’로 세간에 중견기업 회장 급으로 알려진 인물 아니었던가? 이런 분이 아무도 크게 관심 없었던 우리 돌 유산을 모아 박물관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의아할 수 밖에 없었다.

기업 자산을 확대하는 의도에서 석물을 모았지 않았을까? 하는 예측도 해봤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1년에 박물관 운영이 적자임에도 석조 유물에 애착을 가지는 분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 큰 궁금증만 생겼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주연경 학예부장께서 야외 관람장(돌의 정원)을 잠시 둘러 보기를 권했다.

박물관은 서울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성북동에 자리잡고 있었다.

약 5,500평 대지의 우리 옛돌 박물관은 실내 전시관이 약1,000평에 지하1층, 지상 3층건물로 1층에 환수유물관, 2층 동자관, 벅수(돌 장승)관, 자수관, 3층 현대작품 기획 전시관으로 되어 있었다.

인터뷰 전 들러본 야외 전시장은 영국의 스톤헨지(Stonehenge)나 칠레 이스터섬의 명물인 모아이(Moai )석상같이 자연스러운 배경 속에 놓여 있진 않았지만, 박물관 내·외 1,600점 중 석조유물(문인석, 동자석, 장군석 등)을 산기슭 구역을 나눠 테마 별로 모아 놓았다.

잠깐 보았지만 모아놓은 돌 문화 유산을 통해 조상들의 문화와 예술적 감각 뿐만 아니라, 생활해 온 숨결이 느껴졌다. [편집자 주]

 

- 애국심 하나로, 국가도 하기 힘든 일본으로부터 석조 유물 2차에 걸쳐 환수

- 버려진 돌 조각 수집하여 예술적, 역사적 가치 있는 문화재 급으로 의미 상향 

- 흩어져 있는 석조 유물 방대하고 체계적 수집...석조의 미술문화사적 연구 위한 토대 제공 

- 큰 적자에도 불구 ‘우리 옛돌 박물관’ 1,600점 석조 유물 전시...조상의 숨결을 국민들도 공감→석조 유물 대중화에 기여

- 대학교, 박물관, 체육계 등에 금전, 토지, 주식, 문화재를 끊임없이 기부-기증...‘노블리스 오블리제’ 묵묵히 실천 

 

Q. 박물관에 들어오다 얼핏 ‘환수유물관’을 보았습니다. 환수유물관이 이 박물관만의 특징적인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이사장님이 이 박물관을 가꾸는 신념을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제가 잘 파악했나요?

== 제대로 봤습니다.

내가 이 석물들을 모으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국가가 아닌 민간인인 내가 일본으로 유출된 석조 유물 80여점을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바쳐 2차에 걸쳐 환수 받은 유물입니다.

또, 지난 40여년간 우리 석조 유물에 대한 애정과 문화재를 수호 해야 된다는 사명감을 갖게 하는 심정적 바탕을 보여주는 전시관이기도 합니다.

이 생각이 항상 머리에 있었기 때문에 처음 시작할 때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던 국·내외 산재해 있는 석조 유물을 수집하고 보존해 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Q. 그 말씀은 처음부터 전통문화에는 큰 관심이 없었는데,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 조상들의 고유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얘기인가요?

== 꼭 그렇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나는 1974년도 ㈜ 제철화학을 설립해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시기적으로 우리나라 경제도 막 도약기를 앞둔 태동기 아닙니까?

당시에 나도 사업을 시작한 젊은 청년 사업가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외국의 바이어들도 많이 만나는 시기였습니다.

내가 세운 회사 이름에서 보듯이 우리나라 근대산업화를 주도한 포항제철과 관련 있는 협력회사였기 때문에, 바이어 접대가 많은 시절이었습니다.

바이어 한테 훌륭한 대접은 우리의 고유한 전통이나 문화를 경험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인사동 골동품 점을 자주 드나 들게 되면서 도자기와 고서화 등에도 자연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일본에서 환수한 석조유물을 ‘우리옛돌박물관’에 전시 배치하며 기념식을 가졌다.ⓒSR타임스
▲일본에서 환수한 석조유물을 ‘우리옛돌박물관’에 전시 배치하며 기념식을 가졌다.ⓒSR타임스

Q. 그럼 일찍부터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졌었고, 일반인들에 비해 유물을 보는 안목을 키우기 위해 노력도 하신 것이네요?

== 단지 사업으로 받는 스트레스를 골동품을 식별해 보면서 풀어보는 즐거움도 가졌었지만, 당시 포항제철 박태준 회장께서 나의 관심과 안목을 크게 열어주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박 회장께서 포항제철 영빈관에 필요한 그림과 도자기 등의 작품을 구입해 달라고 의뢰했습니다.

그래서 도자기 전문가를 모시고 인사동과 여기 저기 답사하면서, 수운 유덕장의 대나무 그림 들과 신라 토기를 몇 점 구입해서 영빈관에 전시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황량한 영빈관과 주변 배경에 조화가 되게 그림과 도자기를 구입해서 배치하였기 때문에 박 회장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꽤 칭찬을 들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고미술과 도자기 등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인사동 골동품 점도 더 빈번하게 다니게 되었습니다.

 

Q. 조상들의 문화유산에 일찍부터 관심도 있었는데, 더 동기부여를 한 계기도 있었군요. 당시에는 고서화나 도자기 같은 종류가 문화재로 세간에 관심이 있었을 텐데요.

상대적으로 석물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 크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 그렇죠. 당시에는 아무렇게 지나치는게 돌 이었죠. 또 국민들도 돌을 석물로 활용해서 일상적으로 생활에서 사용되는 시기였습니다.

예를 들면, 묘지를 만들 때 비석 같은 것을 국민 누구나 만들어 사용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돌을 유물로 귀하게 생각하는 개념이 일반적으로 크지 않았던 시기죠.

그런 시절이지만 나한테는 생각을 바꿔야 할 계기가 발생했습니다.

1978년쯤 입니다. 평소 내가 잘 다니던 인사동 골동품 가게에서 일본인과 골동품 가게주인이 우리나라 석조 유물 사진이 들어 있는 앨범을 펼쳐놓고 가격 흥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대뜸 골동품상한테 욕을 하면서, 왜 일본사람한테 파느냐고 항의를 했습니다.

그 분이 장사하는 사람은 돈 많이 주는 사람한테 물건 파는게 마땅한 상술이라면서, 나한테 27점 석조 유물을 1억5천만원에 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 당시 좋은 아파트 한 채 값이 기껏 1천만~2천만원 하는 시대입니다. 아파트 열 채가 넘는 가격으로 힘들게 구입해서 집 마당에 세워 놓게 되었습니다.

엉겁결에 가치는 잘 몰랐지만 많은 돈을 투자해서 일본인들한테 넘어가는 석조 유물을 회수했다는 생각으로 뿌듯한 자부심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Q. 그 때에 그 석조 유물을 흥정하던 분이 일본인이 아니라면 무리를 해 가면서 구입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 (조금 시간을 두고 생각하다가) 그럴 수도 있었겠죠.

왜냐하면, 나는 광복 전에 태어났지만 직접 일제 강점기 고초를 겪었다 할 수는 없는 세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세대는 일본의 압제에 대해 감정적으로 반감이 대단한 시대를 겪어 나왔습니다.

어릴 때부터 유관순 누나가 일제에 고문 당하는 무성영화를 보고 분노도 하였습니다. 또 대학시절에는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6.3동지회 활동도 주도하기까지 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석조 유물을 사서 반출한다는 것을 눈 앞에서 보고 즉각 반발할 수 밖에 없었겠죠.

이 사건을 계기로 나 자신 석조 유물에 역사적, 문화적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Q. 그러한 일을 겪고 국·내외 산재해 있는 우리 석조 유물을 본격적으로 수집하고 보존하는 계기도 되었겠군요. 우리나라에 있는 석조 유물 수집도 많이 힘들었겠지만, 거의 일본이겠지만 외국으로 반출된 석조유물의 환수는 더 어려움이 많았겠습니다?

== 일일이 밝히기에는 너무나 사연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조상의 유물을 내 손으로 다시 모아본다는 신념으로 일본으로부터 1, 2차에 걸쳐 환수를 받아 지금 우리 옛돌 박물관에 소장하게 되었습니다.

1차적으로 2000년, 나고야 미에현에 사는 ‘쿠사카 마모루’라는 수집가에게 지금 ‘우리 옛돌 박물관’ 1층 환수유물관에 전시된 문인석 47점외 70점을 환수해 왔습니다.

‘쿠사카’는 당시 한국에서 거래 가격의 다섯 배가 넘는 큰 비용 지불을 요구했습니다.

구입을 작정한 나로서는 요구 가격이 엄청나서 놀랐지만 원래 일본 골동품상의 가격 산정으로는 한국에서 거래되는 가격의 다섯 배는 타당한 가격이었습니다.

일본으로 직접 여러 번 찾아가 설득해 보았지만 ‘쿠사카’ 수집가의 마음을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쿠사카’를 어렵게 한국으로 초대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수장고로 사용하는 용인의 ‘세중옛돌박물관’을 보여주며 석조 유물이 우리나라 국민에게 얼마나 중요한 문화재인지도 재인식시켜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을 같이 여행하며 우리 전통 문화에서 석조 유물이 차지하는 비중도 알려주기까지 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중풍 지병이 있는 그를 서울의 유명한 한의원에서 치료하고 한약 선물까지 했습니다. 또, 아내는 아내대로 김치를 좋아하는 이들 부부에게 직접 담근 김치를 일본으로 보내는 정성도 보였습니다.

이런 노력을 통해 ‘쿠사카마모루’ 수집가로부터 석조유물 70점 중 16점은 값을 치르고 매입했고, 54점은 기증을 받아 용인의 ‘세중옛돌박물관’을 거쳐 현재 ‘우리옛돌박물관’에 소장할 수 있었습니다.

▲포항공대에 6만3천평 학교부지와 많은 금원 기부에, 포항공대 교정에 표지석을 세웠다.ⓒSR타임스
▲포항공대에 6만3천평 학교부지와 많은 금원 기부에, 포항공대 교정에 표지석을 세웠다.ⓒSR타임스

Q. 환수 석물 유물이 70점이나 되기 때문에 반환해 오는데도 어려움이 많았겠습니다?

== 일본에 유출된 우리나라 석조 유물 문화재를 한 개인의 노력으로 반환 받게 되어 너무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반환 받을 때 언론사 문화담당 논설위원 몇 십분, 박물관장님 몇 십분이 참가했고, 일본에서는 나까소네 전 총리 등이 참석했습니다.

또, 그 당시 살풀이 춤으로 유명한 서울대 이애주 교수팀이 살풀이 춤까지 하면서, 행사를 NHK에서 위성중계도 했습니다.

이런 감격도 한 순간이고요, 석조 유물을 일본에서 한국으로 가지고 오는 것도 아주 어려웠습니다. 기중기까지 동원해 한 점씩 나무박스를 만들어 컨테이너에 넣어야 했습니다.

석조 유물은 특히 목 부분이 취약해서 석물의 목이 부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목 부분에 스폰지를 대고 이중, 삼중으로 감싼 다음 다시 전체를 안전하게 포장해 나무상자에 넣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천신만고 끝에, 40피트짜리 큰 컨테이너 3대에 가득 넣어서 나고야항을 출발하여 부산항에 도착, 통관을 거쳐서 용인에 세중박물관으로 오는 길고 험한 여정이었습니다.

 

Q. 2000년 1차 석물 유물을 환수한 후로는 그 이후에는 일본으로부터 환수 유물이 없었나요?

==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해외 석물 문화재 환수에 노력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2019년 ‘오자와 테리유키’가 소장하고 있던 조선초기 장군석과 장명등, 비석받침, 수병 등 8점을 환수하였습니다.

원래 ‘오자와 테리유키’씨 외조부(요시이에 게이조)가 경매로 소장하고 있었는데, 한국에 돌려주기로 결정하고 돌려 줄 여러 박물관을 사전에 물색했답니다.

그 결과 ‘우리 옛돌 박물관’이 석물 유물 수집·보관의 정통성이 뛰어나다는 판단으로 접촉을 하게 되어 환수받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밝혀 둘 것은 이러한 문화재적 석물 유물을 개인이 환수 받는 것이 형식은 기증이지만 내막적으로는 금전적 보상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국가 단위로는 문화재 반환이 외교적 선린관계 명분에서 이뤄지지만, 개인 박물관 반환은 반환 받고자 하는 개인의 신념과 국가를 위한 애국적 가치관뿐만 아니라 금전적 희생이 있어야 결실로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Q.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단순한 나라사랑, 애국심만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데 동의합니다. 개인적인 열정과 용의주도하게 상대의 협력을 구하는 노력도 중요할 거 같고요.

물론 금전적인 지출도 따라야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석물 문화재 환수 문제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제도적으로 이뤄져야 했을 거 같기도 합니다.

== 그렇습니다. 그 말씀에 동감합니다

국가적으로는 정부간에 협의가 잘 되어도 전 국민이 동의하지 않으면 힘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국가가 하는 것이 여의치 못하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석물 유산도 우리 선조들이 역사적으로 또는 시대 상황적으로 보존을 못한 점이 많았습니다. 해외에 반출된 석물을 개인이 환수해 온다는 것은 더 더욱 어렵습니다. 나는 어렵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환수해오는 것이 내가 살면서 우리나라에 기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소명으로 생각하고 진행했습니다.

물론, 석물 문화재 업계의 전문가들과 수집가들이 도와 줘서 그나마 이렇게 라도 환수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해외에 반출된 석물 유산은 상당히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개인이 해외 반출된 석조 유물을 환수하는 데는 시간과 비용 등이 막대하게 들어갑니다. 하물며 정부가 나선다 해도 외국의 민간인이 소유한 유물을 환수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나는 우선 있는 것이라도 외국으로 반출되는 것을 막아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출되지 않게 하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죠.

정부에 100년 이상 된 석조 유물 반출금지법을 제안했습니다. 석조 유물 100년은 생각해 보면 짧은 시간입니다.

예를 들면, 증조할아버지 묘소에 세운 석물을 손자 세대에서 반출하면 거의 100년의 시간이 흐른 것으로 볼 수 있죠.

나의 이런 작은 노력이 모아져 현재는 100년 이상 된 석조 유물은 해외 반출이 금지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98년 동아시아 경기대회에 참가한 레슬링 선수를 격려하는 등, 오랜 동안 대한 레슬링 협회장을 맡아 국가체육발전에 기여했다.ⓒSR타임스
▲1998년 동아시아 경기대회에 참가한 레슬링 선수를 격려하는 등, 오랜 동안 대한 레슬링 협회장을 맡아 국가체육발전에 기여했다.ⓒSR타임스

Q. 애국심을 가지고 해외로 반출된 석조 유물 반환을 위해 갖은 고생을 하셨지만, 국내의 석물 유산을 모으는 길도 녹록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어땠습니까?

== 아, 그렇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집사람과 함께 다니면서 수집도 했지만, 1970년대말부터 1980년대에 걸쳐 석조유물 수집초기부터 ‘돌사랑 모임’을 만들어 전국의 석조 유물을 찾아 답사와 수집을 했습니다.

당시 뜻을 같이 해 행동하는 분들이 김홍남 이대박물관장(전 중앙박물관장), 나선화 이대박물관 학예실장(전 문화재청장), 김정옥 문예진흥원장, 김병종 서울대 미대교수, 이태호(現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전남대 박물관장, 김의광 목인박물관장, 장남원(現 이화여대 박물관장) 이화여대 박물관 학예연구관 등의 20여 분 이었습니다.

 

Q. 이 분야에 쟁쟁한 분들이군요. 같이 답사 다니면서 확인을 하고, 전문적인 의견을 모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수집하고 보관 할 때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었겠습니다. 기억나는 일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 그런 문제가 당연히 있었죠.

우선, 그 사건을 얘기하기에 앞서 수십년 석조 유물을 수집해 온 나는 처음부터 몇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석조 유물을 수집할 때는 공인된 골동품상과 거래를 한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석조 유물은 도난품이 많습니다. 물론 도난품은 가격도 상대적으로 저렴합니다.

둘째, 석조 유물 수집하면서 세운 기준은 골동품상을 통해 정식으로 구입하지만, 그 품목이 도난품임이 밝혀지면 미련없이 주인에게 돌려줍니다.

나는 석조 유물을 구입하면서도 이 원칙을 분명히 지켰습니다.

한참 전입니다. 내가 레슬링협회장을 할 때 방콕 아시안 게임 격려차 태국에 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새벽에 집에서 전화가 와서 경찰이 집안 압수수색을 한다는 겁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골동품상을 통해 정식으로 구입한 사찰 석조 유물이 도난품으로 신고 되었답니다.

아마 사찰 인수인계 과정에서 전 주지와 인계 받는 주지 사이에 발생한 문제인 듯 했습니다. 인계 받는 주지가 내가 구입한 석조 유물을 도난품으로 신고해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귀국해서, 구입한 골동품상을 설득해, 석조 유물을 돌려 주고, 그 물건에 상응한 품목으로 보상받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과 같이 석조 유물은 도난품이 많기 때문에 이러한 기준이 없이 수집하고 소장하면 불상사가 뒤따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누구든지 조심해야 합니다.

 

Q. 사람들이 관심이 많이 없을 때부터 석조 유물에 대한 가치를 이해하고, 그 길이 한편으로는 나라사랑으로도 연결된다고 판단되어 수집과 보관을 해 왔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석조 유물을 수집해 오면서 느끼는 ‘돌’에 대한 가치와 의미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 (한참을 생각하다가 시선을 우측 벽에 붙어 있는 A4 용지를 보다가, 손가락으로 가르킨다)

( 거기에는 '꾸밈없는 것, 사심이 없는 것, 솔직한 것, 뽐내지 않는 것, 민초의 손맛, 이것이 어여쁘지않고 무엇이 어여쁠까' 라고 적혀 있었다)

 

Q. 남들이 하기 어려운 석물 유물 반환을 개인이 이끌어내서 현재 ‘우리 옛돌 박물관’에 보관했는데, 이사장님 한테는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요?

== 이것을 단순히 반환해 온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은 낮은 차원의 의미 부여 입니다. 또, 간단한 나라사랑으로 이 문화재 석조 유물을 반환 받았다는 것도 단순하고 편협 된 애국주의일 수 있습니다.

나는 이 석물 유물을 구입한 일본인도 이 석물의 미술사적인 예술적 의미에 주안을 두고 모았다고 생각합니다.

더 간단하게 말하면 자기가 좋아서 구입해 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 또한 편하게 말씀 드리면 좋아서 반환 받았습니다. 구입하고, 반환 받는 사람들은 이 석물이라는 문화재를 매개로 감정과 감성이 교류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석물 문화재를 매개로 우리의 예술적, 역사성을 공감하고 교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기본적으로 이해한 후에 유물 반환을 받은 나한테 의미를 물어 봐야 됩니다. 즉, 나는 내가 좋아서 한 일이지만 우리 문화를 우리 땅에서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우리의 문화를 남의 나라에서 이질적 문화를 가진 사람이 예술적인 가치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문화의 전통과 맥을 발전시켜야 되겠다는 의지는 상대적으로 나보다 적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문화재 석물을 하나라도 더 모아 놓는 것이 우리 전통의 문화를 발전 시키는 기회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나의 노력이 우리나라가 문화 보국에 도움이 되고 발전해서 문화강국으로 가는데 작은 밑거름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려대에서 명예 경영학 박사, 와세다 대학 법학, 명지대 미술사학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 받는 등 그동안 기여한 분야로 부터 인정을 받았다.ⓒSR타임스
▲고려대에서 명예 경영학 박사, 와세다 대학 법학, 명지대 미술사학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 받는 등 그동안 기여한 분야로 부터 인정을 받았다.ⓒSR타임스

Q.  전체적인 맥락은 이해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사장님께서는 1,600점 석조 유물을 40년 가까이 모으고 전시를 하면서, 이것을 보는 일반인들은 어떻게 느끼시길 기대하십니까?

== 이 문제는 나는 간단하게 대답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석조 유물을 모아서 나 혼자 소장하고, 또 그것을 사고팔고 거래하면 나는 골동품 비즈니스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처음부터 이 석조 유물을 모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는 전문가들에게 보여주고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를 하였습니다.

덧붙여서 이것의 의미를 잘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관람시키려고 전시를 해 왔습니다. 일종의 석조유물 대중화를 기대하는 일이겠죠.

내가 크게 상업적이지 못하고, 내가 좋아하고 느끼는 이 석조 유물 대중화에 따른 전문가들이나 일반인들에게 바람은 아주 평범합니다.

이 석조 유물은 조선시대라든지 그 이외의 시대에 대부분 사용하고 버려지는 존재였습니다.  나는 이런 크게 효용성이 없는 이 석조 유물의 역사성과 예술성을 많은 사람들과 같이 느끼고 싶은 바램입니다.

더 기대한다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옛 것을 아끼고 보존하는데 같이 동참하기를 희망도 합니다.

 

Q. 이제까지 최초 석조 유물 박물관 ‘우리옛돌박물관’을 중심으로 이사장님의 돌 수집에 대한 애착과 환수 유물에 대한 신념 등을 알아 봤습니다.

이사장님께서 그동안 사업으로 많은 돈을 모으셨고, 석조 유물을 중심으로 문화재 수집으로 우리나라 문화보국의 길을 가는데 많이 기여 하셨습니다. 그런 연유로 각 분야 박사학위를 세번 받으셨다면서요?

== 제가 전적으로 연구를 해서 받은 학위는 아니지만 사회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분야에 열심히 하다 보니까 관련된 곳에서 인정을 해줘서 나 또한 보람 있는 학위라고 생각합니다.

모교 고려대학교에서 ㈜제철화학 때부터 ‘한국의 기술’  ’민족의 자본’ ‘우리의 공장’ 등을 캐치 프레이즈로 내걸고 경영을 해왔다고 명예경영학 박사를 받았습니다.

또, 명지대학교로부터 우리 문화유산 보호와 발전에 헌신해 왔다고 명예 미술사학박사를 받았습니다. 이외에, 일본 와세다 대학교에서 고려대학교과의 교류에 앞장 선 공으로 명예법학박사를 받았습니다. 받을 수 있는 것만도 영광인데, 이렇게 자꾸 추켜 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국문화재에 관심이 많은 리퍼터 전 주한미국대사가 천이사장의 희수연에 참석해 건강과 문화재 수집.보관 신념에 경의를 표해 줬다.ⓒSR타임스
▲한국문화재에 관심이 많은 리퍼터 전 주한미국대사가 천이사장의 희수연에 참석해 건강과 문화재 수집.보관 신념에 경의를 표해 줬다.ⓒSR타임스

Q. 받을 만 하니까 받은 것 같습니다. 이사장님이 그동안 경제·산업계, 체육·교육계, 문화계등에서 많은 공적을 남겼기 때문 아닙니까. 또, 사업해서 모은 금원과 문화 유물을 학교 등에 많이 기부도 하지 않았나요?

== 1985년 포항공대에 땅 6만3천평을 기부했고, 그 외 고려대, 연세대, 명지대, 이화여대, 포항공대 등과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민속박물관에 기회가 되면 주식, 금전 기부와 석물 유물 등 문화재를 기증해 왔습니다.

이런 사회활동을 조금 폭넓게 하다 보니 정부로 부터 ‘국민훈장’도 받고 체육훈장 등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훈장과 공로를 인정받기 위해 자발적으로 노력한 부분은 전혀 없습니다.

국민훈장을 받게 된 동기도 그 당시에 감사원장 하는 분과 직원들이 경기도 용인에 있는 2000년 개관한 세중 박물관을 방문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내가 일본으로부터 환수석조유물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감사원장이 자발적으로 관련 정부기관과 협의해 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체육훈장 ‘맹호장’을 받은 것도 내가 아마추어레슬링협회장을 할 때, 올림픽 등에서 메달을 많이 딸 때였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서 메달 하나만 더 따면 ‘청룡장’ 훈장을 받을 수 있는데, 내가 자진해서 급은 낮지만 고대를 상징하는 ’맹호장’을 받았습니다.

제가 상이나 보상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오해 마시기 바랍니다. 나름대로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 ‘우리 옛돌 박물관’이 소재하고 있는 서울 성북구의 ‘성북문화원’ 원장도 맡았습니다.

그 당시 봉사직으로 사업을 하던 사람이 지역에서 문화와의 접점을 어떻게 찾아야 될 지를 많이 고민하고 노력한 시기였습니다.

지금은 사업하는 사람들이 각 지역의 문화원장을 많이 맡고 있지만, 그 때는 내가 시초인 듯해서, 그 나름대로 방향성을 만들었지 않았나 자평해 봅니다.

 

Q. 열정적인 사회활동을 하는 성격이시고, 또 그때그때 현상 파악도 현실적이며 객관적인 이사장님께서 정치를 안하신 점이 의아한데요?

== (허허허 웃다가) 나라고 그 시대마다 정치에 관심이 없었겠습니까?

첫번째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 잠깐 하다가, 당시 서울대총장과 문교부 장관을 지내신 윤천주 국회의원의 권유로 그 분 비서관으로 정치에 입문했습니다.

 

Q. 비서관 생활만 하고 정치를 그만 둔 건 아니죠?

== 비서관 생활을 하면서 나도 국회의원 꿈을 꿔 봤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국회의원이 되려면 ‘30당, 10낙’이란 말이 파다 할 정도로, 지역구 관리 하려면 30억원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역주민 관혼상제 참석은 기본이고, 지역주민 아들 취직 알선 만이 아니라 지역주민들의 은행융자 민원까지 해결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치 안하기로 돌아 섰고 동양철강 공장장을 거쳐 ㈜제철화학을 설립했습니다. 그 이후에 10.26으로 집권한 군사정권 측에서 내 고향 부산 사상구에 출마하기를 종용한 적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 당시에도 내가 출마할 것이라는 소문만 듣고 지역 민원이 쇄도해 오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를 지금같이 하는 것이 나 개인한테도 또 사회에 나라에도 의미가 있겠다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깨끗이 포기했습니다.

▲천신일 이사장의 문화보국과 기업인의 사회적 역할에 관해 대담하는 홍용락 고문.ⓒSR타임스
▲천신일 이사장의 문화보국과 기업인의 사회적 역할에 관해 대담하는 홍용락 고문.ⓒSR타임스

Q.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불편한 진실에 대해 더 여쭙겠습니다. 소위 ‘박연차’사건에 연루되어 고생을 꽤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 고 박연차 회장은 같은 부산 출신이며, 박 회장이 부산 우리 집을 한칸 얻어 사업 시작할 때 타계한 내 동생과 친구였습니다.

갖은 고생을 겪고 사업에 성공한 고 박회장이 지병으로 유명을 달리한 내 친동생 대신 동생 노릇을 한다고 까지 하며 나와 관계를 가졌습니다.

이런 관계의 고 박연차 회장이 고 노무현 대통령과의 문제로 구속되었습니다. 그동안 친형제처럼 지낸 인간적 정리로, 또 신의로 조금이라도 도와 줄려고 나선 겁니다. 인지상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홍용락 논설고문
▲ⓒ홍용락 논설고문

(한 시간 이상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는 천신일 이사장과의 인터뷰는 1시간 30분 가까이 진행되었다.

가감없이 솔직하게 말하는 스타일이다. 예상과는 달리 조용하고 나직나직하게 말을 하는것도 인상적이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열정적이고 사리가 분명하다. 게다가 상황분석이 정확하신 분 같다.

‘명불허전’ 단어를 실감나게 한다. 세중그룹 회장 등으로 돈벌어, 학교와 문화사업에 쾌척하고, 현물 기증도 계속해 온 분이다.

특히, 기업인이 돈 벌어서, 큰 관심 없던 돌 조각을 석물 유물 문화재 반열로 끌어 올리고, 정부도 못하던 반출 석물 문화재를 반환해 온 분이다.

개인의 헌신으로, 나라를 문화보국으로 시대를 업그레이드 시켰다.

그럼에도 시대를 바꾸는 문화인이라는 평가보다는, 비리 기업인 반열로 인식이 더 크다.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기업인을 얕잡아 보는 소위 사농공상(士農工商) 인식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서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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