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

- 현대 미술의 거장 일대기 다룬 웰 메이드 다큐멘터리

- 쿠사마 야요이의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예술작품으로 가득찬 영화

[SR(에스알)타임스 심우진 기자] 일본의 화가이자 설치예술가 쿠사마 야요이를 거론할 때 가장 먼저 꼽는 예술작품은 단연 ‘호박(Pumpkin, 1994)’과 ‘무한 거울의 방(Infinity Mirror Room, 2013)’일 것이다.

그 중 '무한 거울의 방'은 관객이 직접 경험하는 설치미술작품으로 안에 들어서는 순간 거울에 반사돼 펼쳐지는 끝없는 공간을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물방울 형상의 원색 LED라이트들이 현란하게 깜박이는 모습에 빠져든다.

거울 방 안은 말 그대로 무한한 공간이자 우주의 모습 그 자체다. 지상의 어떤 천문학자도 천체 망원경으로는 발견해내지 못할 특별한 우주와 별들이 그 공간 안에 펼쳐진다. '무한 거울의 방'은 만물이 물방울이 되고 그 속에서 생명이 생겨나 사랑으로 승화되는 것을 표현한 작품이다.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독특하고 환상적인 반복 패턴들은 주로 원형의 물방울 무늬다. 그것은 태양이기도 하고 달이기도 하며 물이기도 하다. 끝없는 자유, 생명, 사랑, 평화를 담아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그녀의 가장 어둡고 부정적인 일면에서 출발한 예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다큐멘터리 영화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는 한 천재 예술가의 굴곡진 인생을 되짚어보는 작품이다.

(이 리뷰에는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

◆ 풍족하지만 불행한 어린시절을 겪다

쿠사마 야요이는 공식적으로 '신경 강박증'을 진단받고 투병 중인 정신질환 환자다. 그 원인은 유년시절 불행한 가정환경에 있었다.

그녀는 1929년 일본 나가노현 마츠모토시의 유복한 집안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하지만 데릴사위였던 아버지는 처가에 심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고 도피성 외도를 일삼았다. 어머니는 어린 야요이에게 아버지의 불륜을 염탐하도록 시킨다. 이때 다른 여자들과 어울리는 아버지 모습을 고스란히 목도한 그녀는 정신적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 훗날 그녀가 성행위를 두려워하면서도 ‘남근 의자’로 불렀던 ‘축적(Accumulation No.1, 1962)’ 등 남성기를 모티브로 한 작품을 다수 발표한 것은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기인한다.

한편 부모의 반목은 학대로 이어졌다. 어머니는 스트레스를 자식들에게 풀었다. 그림을 빼앗기곤 했던 쿠사마 야요이는 불안과 히스테리, 공황을 겪게 됐고 밑그림 없이 격하고 빠르게 작품을 완성하는 작업방식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또 그녀는 가족농장의 꽃밭에서 자아를 잃어버린 채 공간 속에 흩어지는 정신적 경험을 한다. 

이런 일련의 경험들은 강박증의 원인이 됐지만 제대로 된 정신과 치료를 받지는 못했다. 쿠사마 야요이는 어릴 때부터 물방울 무늬의 반복된 잔상과 환영에 끝없이 시달린다. 꽃 한송이만 봐도 똑 같은 꽃이 수없이 보이는 공황상태를 겪던 그녀는 오히려 이러한 강박적 정신 문제를 작품 소재로 활용해 예술작품으로 만들었다.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

◆ 미국 뉴욕으로 떠나다

20대 시절 쿠사마 야요이는 몽환적으로 자연을 표현한 화가인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에 매료된다. 특히 여성기를 관능적으로 표현했다고 평가 받는 ‘검은 붓꽃(Black Iris, 1926)’을 접하고 큰 감흥을 얻는다. 이를 계기로 자신의 활동과 작품세계를 무시하는 보수적 일본 사회와 미술계를 떠나 1957년 뉴욕으로 건너간다.

‘무한 그물에 의해 소멸된 비너스상(Statue of Venus Obliterated by Infinity Nets, 1998)’ 등 그녀의 ‘무한 그물(Infinity Net)’ 작품들은 이 시기 태평양을 본 인상에서 비롯된다.

쿠사마 야요이는 작품활동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뉴욕 갤러리의 문을 두드렸다. 프랭크 스텔라, 도널드 저드, 제임스 로젠퀴스트, 앤디 워홀 등과 작품 전시를 통해 교류했다. 그 와중에 초현실주의 콜라주 작가 조셉 코넬과의 로맨스는 세간의 화제가 됐으나 그 만남이 영원하지는 못했다.

무명의 화가이자 동양인 그리고 여성인 쿠사마 야요이는 백인 남성 예술가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미국 예술계에서 차별의 대상이었다. 너무나 뛰어나고 독창적인 작품들임에도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심지어 표절 사건까지 발생한다. 클래스 올덴버그, 루카스 사마라스 그리고 앤디 워홀까지도 쿠사마 야요이의 아이디어를 도용해 자기 작품으로 발표한 것이다. 

쿠사마 야요이는 동료작가들의 배신으로 큰 충격을 받는다. 급기야 정신적으로 심각하게 피폐해져 극단적인 선택까지 시도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예술을 향한 열정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

◆ ‘내 작품을 2달러에 팝니다’

1966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공식 참가하지 못하게 되자 쿠사마 야요이는 1,500개의 미러볼을 행사장 정원에 허락없이 설치한다. ‘나르시스 정원(Narcissus Garden, 1966)’으로 불리는 이 퍼포먼스 아트에서 허영심으로 상징된 미러볼을 값싼 아이스크림처럼 단돈 2달러에 판다. 고가 미술품만 취급하는 비대중적 예술계를 비판한 것이다.

이외에도 ‘뉴욕 현대 미술관 앞 해프닝’, ‘미국 최초의 동성애자 결혼식 해프닝’ 등 전위적인 예술행위를 비롯해 1968년 ‘월스트리트에서의 해부학적 폭발’과 같은 베트남 전쟁 반대 해프닝 공연을 한다. 태평양전쟁에 강제동원 됐던 경험이 있는 쿠사마 야요이는 그 또래 세대 중에서 가장 확고한 전쟁 반대파였다.

하지만 1960년대 그녀의 명성은 과격한 전위예술 행위를 이유로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게 되고 쿠사마 야요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사그라든다.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

◆ 잊힌 예술가 그리고 뒤늦게 인정받은 작품세계

미국에서조차 외면 받기 시작하자 이 천재 예술가는 회한 속에 항우울제를 삼키며 1973년 고향인 일본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일본 언론은 야요이를 예술가로 평가하기보다는 '스캔들의 여왕' 또는 나체 해프닝이나 하는 '선정적인 인물'로 취급한다. 일본 미술계 역시 그녀를 부정적으로 보고 거부한다. 고향사람들도 가족들도 오랫만에 돌아온 그녀를 반기기는 커녕 외면하고 수치스러워했다.

아버지 죽음으로 인해 정신적인 문제가 심각해진 쿠사마 야요이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어둡고 초자연적인 콜라주와 생명의 순환에 대한 작품에 몰두한다. 이 시기에 발표된 ‘고향으로 돌아가는 혼(Soul Going Back to Its home, 1975)’은 새와 그물 같은 나방 날개를 섞어 놓은 듯한 기묘한 공포감을 준다.

최고의 명성을 구가하는 현재 그녀를 생각해본다면 상상하기 힘들지만 1980년대의 쿠사마 야요이는 완전히 잊힌 예술가로 전락한다.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

그러던 1989년, 아시아 근현대 미술연구 학자이자 큐레이터인 알렉산드라 먼로에 의해 미국 뉴욕에서 회고전을 갖게 되면서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들이 재조명 받는다. 알렉산드라 먼로는 지난 2011년 이우환 화백의 회고전인 ‘이우환: 무한의 제시(Lee Ufan: Marking Infinity)’의 기획자이기도 하다.

이후 쿠사마 야요이의 국제적 명성이 드높아지자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일본 여성 최초의 일본대표 예술가로 참가하게 된다.

그녀는 인생 중 긴 시간 동안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조차 이해 받지 못했으며 학대와 무시 속에서 살아왔다. 그렇게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한 채 강박과 공포, 혼란의 심연 속에 가라앉아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던 한 예술가가 노년기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인정받는 모습은 관객에게 울컥한 감정을 솟아오르게 한다.

헤더 렌즈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진보적이며 독특한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만들어낸 '거장'이라는 호칭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쿠사마 야요이에 대해, 그리고 그녀의 무한한 작품세계를 이해하고 싶은 관객들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시간을 갖게 해주는 웰 메이드 다큐멘터리다. 삽입곡 Aloud의 ‘Such a Long Time’과 함께 흐르는 엔드 크레딧의 영상조차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쿠사마 야요이의 예술작품으로 가득 차 있다. 

한편, 제주 본태박물관에서는 쿠사마 야요이의 대표작 ‘무한 거울의 방’과 ‘호박’ 상설전을 진행하고 있다. 이 외에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석파정 서울미술관, 인천 파라다이스 시티에는 ‘호박’이 전시돼 있다.  

영화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는 전체 관람가로 오는 17일 개봉 예정이다.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 ⓒ오드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 ⓒ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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